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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2010/09/10 10:49 from 교육 (Education)

내가 하루 왠종일 죽치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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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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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아다 요나트, 45년만에 여성 노벨화학상

 

 

요나트는 39년 예루살렘의 유대인 빈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이었고, 그의 부모는 가난 때문에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요나트는 유대인들이 아랍계와 건국전쟁을 벌이는 동안 방공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집에 읽을 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단 한 권 늘 손에 들고 다녔던 것이 마리 퀴리의 전기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스티븐 윌리엄 호킹

 

 

케임브리지 대학의 루카스 수학 석좌 교수로 있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그는 (특히 블랙홀이 있는 상황에서의) 우주론과 양자 중력의 연구에 크게 기여했으며, 자신의 이론 및 일반적인 우주론을 다룬 여러 대중 과학서를 저술했다. 그 중 시간의 역사는 런던 선데이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에 최고기록인 237주 동안 실렸다.

 

호킹은 스물한 살 때부터 루게릭병을 앓아 현재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중요한 과학적 업적으로는 로저 펜로즈와 함께 일반상대론적 특이점에 대한 여러 정리를 증명한 것과 함께, 블랙홀이 열복사를 방출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 있다(이는 호킹 복사 혹은 베켄슈타인-호킹 복사로 불린다.).

 

출신대학 : 옥스퍼드

소속 : 케임브리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독일 뮌헨과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김나지움에 진학했으나, 군국주의의 영향으로 자유가 없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신경쇠약으로 공부를 쉬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자, 17세의 아인슈타인은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겠다."라며 학교를 떠났다. 이후 독학으로 공부하여 스위스의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 (ETH)에 응시하였으나 낙방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수학 성적을 눈여겨본 학장의 배려로 1년간 아라우에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서 결국 연방공과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1900년 봄,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시민권 문제와 유대인에 대한 배척으로 취직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한 아인슈타인은 가정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베른에 있는 특허 사무소의 심사관으로 채용되었다. 특허 심사관으로 근무하던 1905년,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물리학 연보 (Annalen der Physik)에 일련의 중요한 논문들을 다섯 편 내었다. 이 논문들에서 그는 광전 효과를 설명하고, 특수상대성이론을 제안하였으며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였다. 또한 "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이라는 논문으로 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중력을 포함한 이론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특허 사무소를 떠나서 스위스에서 그리고 프라하의 독일 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년 겨울 연방 공과 대학교로 돌아왔다. 1914년에는 독일로 돌아와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베를린에 머무르게 된다. 1916년, 마침내 상대성이론을 중력을 포함한 일반상대성이론으로 확장하는 데에 성공하여 물리학 연보에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 (Die Grundlagen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를 발표하였다.

 

1919년 런던 왕립 학회는 기니 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관측에서 그해 5월 29일의 일식을 촬영하였는데,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을 검증한 값들을 내었다고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아인슈타인은 뉴턴 역학의 세계관을 마감한 인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1921년에는 광전 효과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주요업적 : 특수상대성이론, 일반상대성이론, 브라운운동, 광전효과, 질량-에너지등가성, 고전통일장이론, 보즈-아인슈타인통계, EPR역설

수상 : 노벨물리학상(1921), 코플리상(1925), 막스플랑크상(1927)

 

 

 

 

 

테렌스 타오(Táo Zhéxuān)

 

 

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데이비슨 영재프로그램 역사상 여덟살에 SAT 수학에서 700점을 넘은 사람은 타오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이때 타오는 800점 만점에서 760점을 받았다.) 1986년1987년1988년 3년 동안, 타오는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늘 가장 어린 참가자였으며, 각각 순서대로 동메달, 은메달,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금메달 수상 당시 그는 겨우 13살이었고, 이런 기록은 전례가 없었으며 아직 깨지지 않았다. 1992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6년에 엘리어스 스타인의 학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살렘 상2002년에는 보처 상2003년에는 클레이 연구 상을 수상하였으며, 2005년에는 미국 수학회에서 수여하는 레비 코넌트 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에는 수학자 벤 그린과 함께 등차수열에 관한 정수론의 난제를 해결하여 더욱 유명해졌으며, 이에 대한 업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수학회 메달을 수여하였다.

 

2006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필즈상을 받았다. 2007년 현재 UCLA의 수학과 정교수로 재직 중이며,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다.

 

 

 

 

 

에드워드 위튼

 

 

15세에 브랜다이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으며 1971년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서, 또한 1972년 미국 대선 당시 민주당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 참모로 일하였다. 그러던 중 홀연히 물리학으로 관심을 돌려 프린스턴 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하였으며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1976년 25세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물리학에 입문한 지 5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이후 하버드 등에서 강의하였으며 28세에 프린스턴 대학교 정교수가 되었다.

 

현재 이론물리학에서 표준모형의 최대 난점인 중력과 양자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양자중력이론의 후보로 초끈이론을 꼽고 있는데, 그는 이 초끈이론의 제1인자로 평가받고있다. 1970년대 난부닐센서스킨드에 의해 처음 제기된 끈이론은 이후 여러 어려움 속에 발전을 거듭하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에 이렇다할 진전 없이 정체되는 상황에 처하였다. 10차원 상에서의 끈이론이 5가지나 존재하는 등의 모순과 그 수학적 난해성으로 인하여 물리학자들이 끈이론의 효용성에 대해 의심하면서 회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바로 이 때에 위튼이 이들 5가지 끈 이론이 사실은 11차원에 존재하는 하나의 이론(M-이론)이라는 것을 1995년 발표함으로써 끈 이론의 2차 혁명이 시작되게 된다.

 

그는 1990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수학자회의에서 물리학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수학계의 최고권위인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존 포브스 내시 2세

 

 

게임 이론과 미분기하학편미분 방정식과 같은 분야를 연구한 미국의 수학자.

 

내시는 1950년 5월에 프린스턴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던 〈비협력 게임〉(Non-Cooperative Games)으로 1994년에 존 허샤니라인하르트 젤텐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논문의 제출 시기와 그의 수상 시기가 45년의 차이가 나는데, 그것은 그가 그 사이의 기간동안 정신분열증을 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1958년에는 필즈 메달 수상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나이가 아직 젊다는 이유로 매달을 받지 못했고 후에 정신분열증에 걸려 매달을 받을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실비아 네이샤에 의해 전기 《뷰티풀 마인드》로 쓰여졌으며,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48년, 프린스턴 대학원에 학교 역대 최고의 장학금을 받고 입학

-1950년 2월, 게임 이론에 관한 〈비협력 게임〉(Non-Cooperative Games)이란 27페이지의 논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음. (이 논문으로 45년 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음)

-1950년~1954년, 미국 국방성 소속 연구소 RAND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냉전기의 국가간 게임전략이론의 전문가가 됨

-1951년~1959년,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강의

-1958년, 필즈 메달 수상후보

-1978년, John Von Neumann 이론상 수상

-199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1999년, 미국수학회가 주는 Leroy Steele Prize 수상

 

 

 

 

 

지그문트 프로이트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파의 창시자.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 제국(오늘날에는 체코 영토이다) 프리보르의 모라비아인 마을에서 가난한 갈리치아계 유대인<SUP> </SUP>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그문트는 여덟 자녀 가운데 장남이었으며, 비상한 지력 덕분에 어릴때부터 다른 형제 자매보다 그를 아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과 억압의 방어 기제에 대한 이론, 그리고 환자와 정신분석자의 대화를 통하여 정신 병리를 치료하는 정신분석학적 임상 치료 방식을 창안한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또 그는 성욕을 인간 생활에서 주요한 동기 부여의 에너지로 새로이 정의하였으며, 자유 연상, 치료 관계에서 감정 전이의 이론, 그리고 을 통해 무의식적 욕구를 관찰하는 등 치료 기법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뇌성마비를 연구한 초기 신경병 학자이기도 하였다.

 

신프로이트주의에서 프로이트의 많은 이론을 버리거나 수정하였으며, 20세기 말에 심리학 분야가 발전하면서 프로이트 이론에서 여러 결함이 드러났으나, 프로이트의 방법과 관념은 임상 정신 역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생각은 인문 과학과 일부 사회 과학에서 계속 영향을 주고 있다.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독일 출신의 공산주의 계열 혁명가, 역사가, 경제학자, 철학자, 사회학자,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1847년 공산주의자동맹을 창건했다. 1847년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집필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초판이 출간된 《자본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0월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라인란트 지방의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수대에 걸친 유대교 랍비의 후예였다.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했다. 아버지가 개종한 또다른 이유는 그 자신이 자유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마르크스는 개방된 어린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20세기 언어철학분석철학의 발판을 놓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9일 20시 30분,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에서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레오폴디네 카를무스 사이에서 5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계는 개신교로 개종한, 어머니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이었으며(외할머니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8명의 자녀는 어머니의 주장에 따라 가톨릭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카를은 오스트리아의 철강 산업을 육성하는 데 이바지하였으며, 당시 오스트리아의 대부호로서 손꼽혔다. 카를은 경제계에서 은퇴한 후 예술 애호가로 잘 알려져 당시 빈의 유명한 음악가, 미술가, 문학 작가들이 비트겐슈타인가의 저택을 자주 드나든 것으로 알려졌으며, 거의 모든 자녀들은 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피아니스트였으며, 음악 후원자였다.

 

1906년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문의 전통에 따라 기술(기계공학) 분야에서 활동할 계획으로 현 베를린 공과대학의 전신인 베를린 샬로텐부르그 기술전문대학에 입학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시절부터 철학 노트를 쓰기 시작한다.

 

1908년 5월 5일 졸업을 하며 공학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곧바로 영국으로 건너가 맨체스터 공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 《수학의 원리들》과 프레게, 《산수의 근본 법칙》을 읽는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가을부터 기계공학과 연구생으로 비행기 엔진과 프로펠러에 대해 연구하는데, 이 결과로서 1911년에는 특허를 취득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후에 헬리콥터 개발에 쓰인 엔진 방식이 이 연구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1911년까지 공학도로서 강의를 듣던 중에 강사 리틀우드에게서 러셀이 최근에 출판한 《수학의 원리》에 대해서 소개를 받는다. 여기서 처음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며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1911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가 러셀 밑에서 철학 공부를 하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며 여기서 또한 20세기 분석철학의 중요한 선구자 가운데 하나인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알게 된다.

 

 

 

 

 

폴 새뮤얼슨

 

 

미국 신고전파 경제학자로 그의 1947년 책 경제 분석의 기초에서 다룬 비교 정태 분석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을 비롯 경제학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기여로 알려져 있다.

 

1947년에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여했고, 1970년 역사상 두 번째로 수여된 노벨 경제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그의 제자 로런스 클라인(1980년), 조지 애컬로프와 조지프 스티글리츠(이상 2001년), 폴 크루그먼(2008년) 등 4명도 노벨상을 수상했다. 1948년에 집필한 '경제학(Economics)'은 19판까지 발간됐고, 가장 인기있는 대학교재 중 하나로 여겨진다. 신고전학파의 미시적 시장균형 이론과 케인스의 거시경제 이론을 접목시켜 '신고전파 종합이론(Neoclassical Synthesis)'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완성했다.

 

1915년 5월 15일 인디애나의 개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약사였고, 그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랐다. 1923년 폴은 시카고로 이주했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35년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석사를 1936년에 받았으며, 1941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라이벌은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통화학파의 거두이자 시카고대에서 함께 공부한 밀턴 프리드먼.

 

 

 

 

 

밀턴 프리드먼

 

 

자유주의 시장경제 옹호자로 거시경제학을 위시하여 미시경제학경제사경제통계학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76년에 소비분석, 통화의 이론과 역사 그리고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관한 논증 등의 업적으로 노벨 경제학상 수상.

 

프리드먼은 케인즈와 더불어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경제학자로 여겨진다.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그는 정치적·사회적 자유의 창조의 수단으로 자유시장 내 정부가 맡는 역할이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텔레비전 시리즈인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 1980년대 PBS 방송국에서 방영)에서 프리드먼은 자유시장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설명하고 여타의 체제에서 풀지 못한 정치적·사회적 문제의 해결할 수 있는 자유시장의 작동원리를 강조하였다.

 

밀턴 프리드먼은 1912년 뉴욕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프리드먼의 부모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가난한 유대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근무환경이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서 재봉사로 일하다가 얼마 후에는 고가철도 옆에서 초라한 잡화점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조그만 사업에 실패하고 후두염에 시달리다가 밀턴이 15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토마스 새뮤얼 쿤

 

 

미국의 과학사학자이자 과학철학자. 《과학 혁명의 구조》로 유명하다. 철학, 심리학, 언어학, 사회학등 여러 분야를 섭렵하여 과학철학에 큰 업적을 남기었다.

 

1922년 7월 18일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시에서 유대인 가정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새뮤얼은 반전 평화주의자로서 하버드 대학교와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미네트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1943년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 연구소에서 2년 동안 군복무를 했으며, 군복무를 마친 뒤 하버드 대학교 물리학과 대학원으로 되돌아가 고체 물리로 박사 과정을 밟았다.

 

 

 

 

 

노엄 촘스키

 

 

미국의 언어학자철학자정치운동가아나키스트저술가이자 진보적 교수(MIT 언어학과)로 유대인 혈통.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만들어낸 학자로 유명하여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언어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그는 철학 분야에서 1950년대에 주류였던 B. F. 스키너의 언어행동을 연구 행동주의자들을 비판하여 인식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인지과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자연주의적인 언어학의 접근은 정신과 언어의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촘스키는 1956년에 형식언어를 생성하는 형식문법의 부류들 사이의 위계인 촘스키 위계를 만들었다.

 

예술 및 인문학 인용 색인(A&HCI)에 의하면 1980년부터 1992년 사이에 촘스키는 생존해 있는 학자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이고, 역대 인물 중 여덟 번째로 자주 인용되는 학자로 기록되어 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부터 미디어 비평과 정치적 행동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으며 현재 미국 정치에서 좌파의"가장 중요한 지식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1928년 12월 7일 우크라이나 출신의 히브리어 학자인 윌리엄 촘스키(1896–1977)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 주필라델피아 부근의 이스트 오크 레인에서 태어났다.

 

 

 

 

 

폴 크루그먼

 

 

유대계 미국의 지식인경제학자컬럼니스트작가프린스턴 대학교의 경제학과 국제학부의 교수.

 

교역 이론 및 신교역이론과 환율 위기에 대한 해설을 담은 그의 교과서로 학계에서 잘 알려져있다. 그 저서는 기업과 나라가 규모의 경제 때문에 생산하고 거래하는 것에 관한 모델을 제시한다.

 

1991년에는 미국경제학회에서 수여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2008년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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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본인의 의견및 빠심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글이며 사실과 다른점이 있을수 있지만
읽어두면 너한테 도움이 되면됬지 안좋을일은 없는글입니다. 그러니깐 그냥 읽으세요)


[Paul Anthony Samuelson. May 15, 1915 – December 13, 2009]

얼마전 타계하신 새뮤얼슨 할아버지. 

나에게는 경제학 이론의 대 스승같은 분이시고 그런 이유로 지난달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을때 
충격으로 3일간 밥도 제대로 못먹었다.

어떤이유인지는 몰라도 어린시절부터 그의 이론이 '그냥' 좋았고 나에게는 쫙쫙 달라붙었다.
그래 솔직히얘기하면 나는 소위말하는 새뮤얼슨의 "빠"였다

어쨋든 저 새뮤얼슨이 어떤인물이냐. 뭐 여느 경제학자나 다름없이 시카고학부출신 엄친아중 한분이다.
(사실 스펙이라도 받쳐줘야 뻘소리 한번에 천재들에 타작질당하는 경제학계에서 명함이나 내밀겠지만)
학교만 봐도 시카고BA, 하버드 Ph.D 따신후에 MIT에선 교수하셨다. 
(막상 새뮤얼슨 선생께서는 학벌주의의 무의미함을 강조하신다. 아아..선생이여)

어쨋든 본론으로 넘어가자.

새뮤얼슨은 기존의 부작용이 많았던 방임주의세계의에 대한 방안으로 혼합경제 체제의이론을 
마련한 경제학자들중 대표급이고 거두였다. 1947년 하버드의 슘페터교수의 수제자로 있던시절 
그가쓴 논문 'Foundations of Economic Analysis', 그리고 다음해에 썼던 'Economics' 두권을 
출권한 후에 그는 미국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는다. (사실 3회째여서 최초라는 단어가 무색하긴 하다)
이 중 'Economics' 이 책은 대학생이라면 피해갈수없는 "맨큐의 경제학"책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세기동안 미국 경제학의 대표저서가 된다. 

이 두권의 책은 미국 전후 경제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수있고 노벨상 이외에 미국 
경제학회에서 수여하던 클라크상까지 받아 상복이 터지는 기염을 토한다. (어째 표현이좀 이상하다만..)

새뮤얼슨은 기존에 만연하던 케인즈의 이론을 보완한 가속도의 원리를 주장하게 된다
내가 지난번 글에 써놨듯이 케인즈는 정부의 투자가 경제를 살릴거라고 주장하였는데 
새뮤얼슨은 이에대해 두가지 반박을 한다. 

첫째. 투자의 증가가 소득에 증가로 이어질때까지 걸리는 (오랜)시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둘째. 정부의 투자가 사기업들의 투자를 위축시킬수 있다는것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다.

Keynesian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결함들을 보완하기 위해 투자가 소비를 발생시킨다는 
투자승수 이론에 소비가 투자를 가속화시킨다는 가속도 원리를 결합한다. 
만약에 소비가 20% 증가했을때 가속도 현상으로 인해 투자도 20%는 이어지고 다시 소비가 
20% 증가하는 현상으로 반복진행된다. 

투자 - 소비 - 투자 - 소비 - 투자 - 소비 - 투자 - 소비 - 투자 - 소비 - 투자 - 소비 - 투자

이런식으로 투자 - 소비 - 투자로 이어지는 순환 과정이 설명된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의 경제학은 투자가 소비를 증대시키는 비율과 
소비가 투자를 가속화시키는 비율의 크기또한 중요한 관점이다.

이론적으로 봤을때는 가속도계수가 크면 클수록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어있지만
소비성향과 가속도 게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다고 보았고
그런 이유로 자본주의 경제는 성장이나 퇴조가 그다지 큰 진폭없이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며 나아갈것 이라고 생각한다.

새뮤얼슨의 이론을 살펴보면 정부의 역활이 검토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포함된 신 고적학파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정부의 역활은 만능이기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정부는 모든 분야에 지출을 증가시키며 세계 기업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미국의 경제체제는 모든 분야에 정부의 개입이 증가되는 혼합경제 체제로 바뀌며 
한 예로 1946년에 발표한 Employment Act 의 제정으로 정부에서 고용에 대한 책임까지 지게된다.


어쨋든 새뮤얼슨이 주장하는 정부의 역활을 다시한번 알아보며 글을 마치자.


1. 자유 방임시장은 현실속에서 주기적인 불황과 직면하는데 정부의 재정 정책과
금융 정책이 시장의 불황을 적절하게 막을 수 있는 조절기구 역활을 해야한다. (혹은 할수있다.)

현 경재상황을 예견하신 새뮤얼슨 선생님의 위엄이시다. 꿇어라, 자유방임주의자 경제학자들아. 

실제로 자유를 외치던 프리드먼이 사사건건 새뮤얼슨 발목잡고 늘어지며 정부의 역활축소를 외쳤지만
지금 경제상황을 직면했을때 과연 뭐라고 반박할수 있을까. 

규제없이 놔뒀더니 부동산시장 과열해서 거품속에 펑!
정부가 손놓고 지켜봤더니 부동산 거품터지면서 금융 펑, 국민경제 펑, 사기업 도산 펑펑펑.

2. 거대 기업이 독과점으로 시장을 지배하려할때 정부의 규제가 해결책이다.

이건 경제학 한학기 발로들었어도 고개 끄덕이며 공감하실듯?

3. 이윤의 확보가 불투명하면서 생산비가 거대해 사기업이 참여하지 않는 간접자본들, 예를들어
도로, 항공, 항만등 경제생활에 필요한 설비들 (공공재) 의 확충 정부가 떠맡아야한다.

이건 사실 말할 필요도 없는주제고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선 반대라는게 있을수 없는 의견이다.

4.  외부성까지 정부가 해결해야한다.

여기서 약간 호불호가 갈리긴 하는데 사기업 스스로는 이익을 내는 집단이기 때문에
외부성을 고려하기보다는 본연에 충실한다. 고로 정부에서 규제를 하지 않는이상은
외부성이라는게 컨트롤이 된다는게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본다. 고로 반박불가.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새뮤얼슨 선생의 젊었던 시절 사진을 올리며 글을 마친다.

(아아 과연 수려한 외모의 미청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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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any Harvard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 bulb? 

One. He holds the bulb and the world revolves around him. 

How many Princeton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 bulb? 

Two. One to mix the martinis and one to call the electrician. 

Or: Change? 

How many Dartmouth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bulb? 

None. Hanover doesn't have electricity. 

How many Cornell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bulb? 

Two. One to change the light bulb and one to crack under the pressure. 

How many Columbia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bulb? 

Seventy-six. One to change the light bulb, fifty to protest the light bulb's right to not change, and twenty-five to hold a counter-protest. 

How many Yale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bulb? 

None. New Haven looks better in the dark. 

How many Penn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bulb? 

Just one, but he gets six credits for it. 

Or: Nine. One to change the light bulb, and eight to file their transfer apps. 

How many Brown students does it take to change a lightbulb? 

Eleven. One to change the lightbulb and ten to share the experience.




When You ask an Ivy Leaguer where they went,

Harvard grad: I am a Harvard Graduate.
Yale: I went to Yale
Princeton: I went to Princeton
Columbia: I went to Columbia. Not SEAS.
Dartmouth: I am a Dartmouth grad.
Brown: I went to Brown.
UPenn: I went to Penn.
Cornell: I have an Ivy League Education.






재미있어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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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2009/12/06 22:20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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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your greatest strength?

what is your weakness?

why should we hire you?

what is your goal after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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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글 썼다가 어디 틀리기라도 하면 3박4일 털릴건 알지만 (가뜩이나 인물이 인물이니)

최소한 루져드립만큼 흥하진 않을테니 용감히 써봅니다.




고등학생들은 니들 대학가서 이양반 경제학 시간마다 들을테니 
미리 공부해 놓으신다고 생각하고 들으시고
벌써 공부 끝내신 분들은 보지마세요 ^_^)a


John Maynard Keynes (1883 ~ 1946) - 영국인
그 유명한 케인지언 학파의 창시자이며 현대 경제학 이론들의 아버지.
전까지는 이론과 이념중심의 경제학을 정책과 연결해 보다 현실적인 경제학을 만들어냈고
이 아저씨로 인해 개별주체의 경제에서 사회전체로 전환된 거시경제학이라는 분야를 열었다.
현대 경제학은 이 아저씨의 이론들(Keynesian Theory) 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최근에 경제붕괴로 인해 욕은 있는비평 없는비평 만들어서 받았지만 케인즈의 이론들은
획기적인 이론이 탄생하지 않는이상 향후 커다란 뼈대는 몇십년간 건재할듯 하다.


저아저씬 이미 나이 스물여섯에 케임브릿지에서 강사를 하고있었고
증권투자로 돈을 쓸었던 투자의 귀재고 IMF 창설에 주도적인 역활까지 한사람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과 역사는 엄마 친구 아들들이 주도한다. (-_-)


이 아저씨가 또한 대단한 이유 하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들이 독일의 재건불능을 위해 
조취를 취하기 위한 모임에 참가했는데 이곳에서 독일의 영토 1/6과 식민지 이권을 모두 뺴았고 
군대규모제한 및 전쟁배상금액 1,300억 마르크를 요구하자고 하자 영국 재무성으로 참가한 케인스는
그것에 대해 자신의 소신에 따라 격렬한 비판을 하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표를 내었다.
그는 종전 이후의 평화적인 귀결을위해 평화적인 결말을 주장했으며 자국민들과 언론에게 
온갖 비난이란 비난은 다 들었어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하는바를 용감하게 밝혔다.
그리고 1919년, 케인즈의 주장을 무시했던 승전국들은 세계 제 2차대전을 맞게된다.
이 대목이야말로 놀라운 케인즈의 통찰력이 아닐수 없다.


아담스미스의 자유 방임주의 (보이지않는 손이 시장을 조절한다는 케인즈시대 이전의 지배적 의견) 는
1924년 10월의 Black Thursday (also, Wall Street Crash of 1929) 이후로 뒤집혀버리고 만다. 
[Black Thursday - 1924년 10월 24일, 목요일. 주가 호재가 한번에 뒤집히며 주식 총가치가 1/5 로 
줄어버린 엄청난 사건, 지금 경제위기 하고는 비교도 안될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기업의 설비도 튼튼했고 노동자들도 건재했고 자연자원도 풍부했다. 하지만 공황을 막지는 못했다.
소비자들이 돈이없어서 소비가 마비되버린 미국은 생산도 따라 죽어버리고 생산이 죽으니 일자리가 줄고 
그러다보니 노동자들이 돈이 없어지고 악순환은 무섭게 반복됬다.

(얼마전에 미국에서 디플레이션과 저소비가 일어나자 부시-오바마 정부가 몇차례에 걸쳐서 세금 돌려주고
차값 깎아주고 있는돈 없는돈 전부 부워가면서 소비심리 일으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황이 다시한번 
때렸을때 그 폭풍이 두려운것이다, 그때가서 손쓰기엔 이미 늦은거고)


다른 경제학자들은 그 상황을 일시적으로 보았기때문에 어떠한 처방도 내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고
(라고는 하지만 그 전의 경제학은 저렇게 무식하게 오는 공황같은건 애초에 배제된 이론들이었다.)
그나마 마르크스정도면 자본주의 파멸을 즐거워하며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 시점에서 케인즈의 경제학이 혁명을 일으켰고 자본주의 공황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면서도 
실제적인 처방으로 자본주의의 무한한 발전을 물색했다. 
케인즈는 정부의 자발적 참여로 인해 노동자들에게 소비할 수 있는 돈을 쥐어줄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고 케인즈의 이론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통해 현실성을 획득하였다.


예를들면 이런거다, 노동자들에게 나무를 뽑게해서 정부에서 돈을 지급한 다음
개간 해놓은 땅에 다시 나무를 심게해서 임금을 지급한다. 
(쉽게말해서 땅파놓고 돈주고 다시 묻게해놓고 돈을 다시준다.)
이런일을 할 사기업은 세상에 없다고 봐야하기 때문에 돈은 정부에서 지급한다.


루즈벨트는 뉴딜을 통해 대규모 공공시설등에 투자하고 광범위한 실업자 구제사업을 벌이고
생산제한에 대한 보상급 지급과 나중가서는 테네시 계곡에 댐까지 건설해 가면서
노동자들에게 소비할 수 잇는 여건을 만들어줬다. 작년에 있었던 tax-return 하고 같은 맥락으로 보면된다.
정부는 빛을 지겠지만 이걸 투자로 봤을때 국민의 소득이 되고 구매력 상승으로 이어지며 
민간의 투자를 유발하게 됨과 동시에 기업에 있어서는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게된다.


하지만 정부에서 빚을 얻어가면서까지 그 거대한 금액을 투자를 할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문,
그리고 투자한 금액에 비해 국민에게 돌아갈 이윤은 적다는 반박에 대해서
케인스는 '투자승수이론'(투자는 그 금액만큼의 소득으로 이어지는게 아니라 더 많은 소득으로 
이어지게 되며 더 많은 소비를 돌릴수 있다는 주장) 을 제시한다


정부의 일정한 신규 투자가 국민 소득과 소비의 규모에 있어서는 더 크게 일어남을 보여준는
이 이론은 미국에서 크게 받아들여졌고 아직까지 미국 경제가 소비위주의 경제인 이유와도 크게 
무관하지 않다. 미국 내에서도 Paul Samuelson, Franco Modigliani 등의 걸출한 경제학자들이
케인즈의 제자로 미국 경제에 어지간한 영향을 끼쳤고 니들 대학교제에서도 거진 이 아저씨 이론이
대세를 이룬다고 보면된다.

이건 잡담



1편을 워낙 거창(?) 하게 써놔서 다음글 쓸때 부담될지도 모르겠다.

누구 그림 잘그리는사람 하나 있으면 삽화좀 넣어달라고 하고싶은데.

아마 다음편은 이 기세를 이어서 폴 새뮤얼슨을 쓰거나 주제를 바꿔서 알프래드 마샬로 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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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편 보러가기


책임 전가하지 않기 - 내게 주어진 상황은 어쨋든 내 책임이다.

절박함에 감사하기 - 절박한 상황이 되서야 발전할 수 있다.

성공의 이유 - 돈이 없으면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도 대처할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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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폭스TV 임원으로 공화당 대통령들의 자문이었던 로저 에일레스는 ‘당신이 메시지’란 책에서 첫 인상을 사로잡는 데 7초면 충분하다고 했다.하물며 취업 면접이라면 단번에 좋은 인상을 심어야 하는 압박감이 훨씬 강할 것이다.

다. 면접하면서 파리가 날아다니거나 물을 엎지르거나 심지어 면접 보는 회사 이름을 잘못 내뱉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더라도 빠져나갈 방법은 있기 마련이다.

 ’피어싱을 한 채 면접을 볼 수 있을까요(Can I Wear My Nose Ring to the Interview?)란 책을 쓴 엘렌 리브스는 “한 여성 면접자가 의자에 앉으려 했는데 의자가 뒤로 쭉 밀리면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의자를 바로 하더니 앉으며 농담을 던졌다.그녀는 약점을 모면하는 법을 알고 있었고 취업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다음은 면접을 망칠 수 있는 10가지 일들과 그때마다 궁지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들이다.

 1. 면접 날 몸이 아프다면.

 순교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접어라.감기에 걸렸다면 전화를 걸어 면접을 연기시켜라.리브스는 “예전에 한 입사 지원자가 몸이 좋지 않은데도 기신기신 면접장에 나왔다고 자랑하는 것을 봤다.난 ‘왜 그냥 연기하시지?’라고 생각했다.아! 헌신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가 보구나.그런데 채용자들은 감기를 옮길 위험이 없을 때 당신을 면접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2. 눈두덩이가 시퍼렇다면.

 눈두덩이가 시퍼렇든지,다리가 부러졌든지 아니면 얼굴에 흉터가 생겼든지 어떤 형태로든 다쳤다면 다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은 효과를 면접에서 볼 수 있을지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심각하거나 핸디캡이 된다고 판단되면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좋다.전화를 안해도 되겠다고 결정을 내렸으면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보통 스포츠를 즐기다 다치는 게 바에서 싸웠다고 둘러대는 것보다 잘 통한다.

 3. 코에 피어싱을 했다면.

 피어싱이나 문신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회사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걸 보이지 않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만약 감추기가 어렵다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회사에 전화를 걸어 피어싱에 관대한지 분위기를 염탐하라.아니라고 하면 피어싱이나 문신을 없애거나 감춰라.그런데 그게 내키지 않는다면 그 회사 문화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4. 땀을 질질 흘린다면.

 사람이니 땀을 흘리는 건 당연하다.하지만 면접관에게 들키면 안 된다.스프링쿨러처럼 땀을 뿜어내며 면접장에 도착했더라도 반드시 화장실에 들러 숨을 가다듬어야 한다.땀이 흥건한 손으로 악수하면 불쾌한 느낌을 줄 수 있다.찬물을 틀어 손을 씻은 뒤 깨끗이 말려라.

 5. 옷차림이 변변치 않다면.

 옷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오래 가지 않는다.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어떤 옷을 입을지 갈등하게 된다.이미지 컨설턴트인 로렌 솔로몬은 “잘 어울릴 수 있고 팀의 일원으로 보이게 하되 한 걸음 정도만 도드라져 보이는 게 좋다.”며 회사 홈페이지에서 선배들 사진을 찾아보거나 비서에게 물어보거나 트위터에 질문을 올리는 방법을 추천했다.이 모두가 여의치 않으면 가장 무난한 차림새를 하면 된다.

 6. 지각했다면.

 면접에 지각한다는 건 정말로 변명할 여지가 없다.미리 회사 가는 길을 알아보고 걸리는 시간을 여유있게 잡아 가라.만약 길이 막히거나 기차가 연착하거나 사무실 밖에 미확인비행물체(UFO)가 내려앉아 어쩔 수 없이 지각해야 한다면 면접관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 시간을 재조정해줄 수 있는지 물어보라.물론 채용 담당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한편 그들이 이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7. 너무 일찍 도착했다면.

 면접장에 너무 일찍 도착해 30분 정도 회사 로비에서 어슬렁거리는 건 당신을 비참한 존재로 비치게 만든다.만약 그랬다면 커피숍에 앉아 기다리거나 아예 자동차 안에서 기다리는 게 좋다.적어도 예정된 시간 10분 전까지는 건물 안에 들어가지 말라.

 8. 로비에서 시간을 잘못 보낸다면.

 로비에서 보내는 10분도 면접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리브스는 “경비원과 수위,창구직원까지 모두 당신을 나름 평가할 것”이라며 “당신이 무례하거나 오만하게 군다면 그들이 일러바쳐 직장을 구하는 데 실패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휴대전화에 대고 전날 밤의 무용담이나 읽은 책에 대해 떠드는 건 좋지 않다.차라리 업계 소식을 담은 잡지를 들여다보거나 전광판 등에서 회사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는 게 좋다.

 9. 악수하는 손아귀에 힘이 모자라면.

 아이오와 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힘차게 손을 맞잡는 것은 겉모습보다 면접관에게 훨씬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가장 적절한 악수의 세기는 죽은 물고기를 만지는 것과 뼈가 으스러지게 악수하는 것의 중간 쯤이다.바보처럼 들리겠지만 악수를 잘하면 상대방을 친구로 만들 수 있다.또 면접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그의 이름을 언급해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10. 한담(閑談)에 서투르다면.

 면접장에 가려고 홀을 가로질러 갈 때 면접관에게 건넬 몇 가지 질문을 생각해둬라.사원들끼리 낚시를 떠나는 것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면 기업문화를 익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다.또하나,무난한 주제는 면접관이 어떻게 이 기업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했느냐고 묻는 것이다.면접관의 개인적인 이력 등에 대해 흥미를 드러내보이는 것도 아주 쉽게 그이와 정서적으로 묶일 수 있어 좋다.

<무단펌글로 보이는글 재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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